주일 말씀
주일설교
세리와 바리새인
성 경: 누가복음 18:9-14
설교자: 원영만 목사
설교일 : 2019. 10. 27.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8:9-14
거룩한 주일 하나님의 전에 나오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특별히 우리교회 처음 나오신 분들이나, 오랜만에 방문하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크신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스무 번째 주일입니다. 읽어주신 본문의 말씀으로 『세리와 바리새인』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는 그림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들려주고 싶으신 내용을 비유라는 그림의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하여 주시곤 하셨습니다. 오늘 들려주신 비유의 말씀에는 매우 극적인 대비를 이루고 있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두 사람은 각자 분명하게 대비되는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렸고, 그중 한 사람은 그 기도에 응답을 받았고, 다른 한 사람은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응답받은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비유의 언어는 그 안에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내포되어 있는 뜻은 숨겨져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 뜻은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의 일 하심으로 말미암아 드러나게 됩니다. 표면적인 이해만을 가지고서는 깊으신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밖으로 보여지는 것만을 가지고 섣불리 풀어가려고 하다가는 비유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기보다 오해하거나 왜곡하기가 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 이단이 언제나 그렇듯이 자기들만이, 즉 몇몇 사람만 성경의 비유를 풀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의 비유는 모든 이에게 열려있습니다. 이를 풀어주시며 깨닫게 하시는 분을 성령이십니다.
성경의 비유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그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들은 말씀을 순전한 마음으로 간직하며 그 말씀 그대로 행동하기 위해 노력하고 실제로 행동하는 가운데 그 신비한 뜻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분명히 약속하셨고 이 일을 위해 성령을 보내주셨으며 지금도 성령은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실천하는 이들에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복된 자입니다. 그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의롭다’ 확신하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자신 스스로 ‘나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면서 ‘저들은 나처럼 의롭지 못한 사람들이군!’ 단정 짓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다른 이들은 멸시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 몇몇을 발견하시고서는 비유로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특별히 힘쓰고 애쓰는 경건한 이들 마음속에 이 생각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래도 나는 이 정도면 되는 거 아니야?’ 그리고는 다른 이들의 신앙생활을 보면서 ‘저건 제대로 된 신앙이 아니야, 엉터리군. 저렇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안 하는 게 낫지!’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립니다.
이내 그의 눈빛은 차가워집니다. 그리고는 경멸하고, 멸시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순간순간 그 마음에 있는 것들이 밖으로 튀어나옵니다. 그때마다 ‘말실수했다.’ 은근슬쩍 넘겨 버리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실수가 아니다.’ ‘너의 마음에 가득한 것이 밖으로 흘러나온 것뿐이다.’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그들의 흠을 잡아내고, 멸시하는 이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모습이 얼마나 추한지를 모른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실체의 모습을 보아야 회개가 시작되는데 온갖 시선을 다른 이들에게 두다 보니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볼 때 그 거룩한 빛 가운데 자신의 참담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식사할 때 예수님의 온몸에 향유를 부은 한 여인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시몬아 너는 이 여인을 보고 있는 거지? 하였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 죄인인 여인을 계속해서 나만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아니? 신앙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람만 보면 문제가 생깁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사람들의 신앙생활은 하면 할수록 정죄만 있지 기쁨과 감격, 사랑과 평화는 잃어버린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사랑이 없는 겁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고전13:2) 사랑이 없으니 그들 마음에는 하나님도 없고 그분의 나라도 없습니다. 기쁨도 즐거움도 없습니다. 그곳은 분명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무리인 ‘교회’ 안에 특별히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이러한 부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특별히 조심해야 함을 여러 번에 걸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다 확신하고 다른 이들을 멸시하는 몇몇 이들에게 주님께서 비유해 주신 말씀은 이렇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갑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이 혼잣말로 서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는 남의 것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다른 이들의 것을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내 것으로 만들지는 않을까 해서 조심하고 또 조심했습니다. 또한 불의한 일을 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실제로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간음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이들처럼 살지 않으려고, 경건하게 살아가려고 몸부림치고 몸부림쳤던 한 주간이었습니다. 하나님, 특별히 저기 저 세리 같은 인생이 되지 않은 것이 참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 저는 이번에도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고, 주님께서 주신 모든 소득 중에서 말씀하신 대로 십의 일을 분명하게 구별하여 드렸습니다.
여러분은 바리새인하면 어떤 느낌이 떠오르시나요? 바리새인하면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네거티브한 부정적인 이미지입니다. 이중적인 사람들, 위선자인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혹 다른 이들이 나에게 ‘너 바리새인 같아’ 하면 상당히 기분이 나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바리새인이라고 하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예수님이 활동하시고, 이 말씀이 처음 독자에게 읽혀지고 쓰여지던 그 시대에는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이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바리새인은 경건한 사람들을 대표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바벨론 포로기 이후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어려울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회당을 세우고 그곳에 모여 말씀을 읽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통해서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철저하게 토라, 즉 율법을 지키고 그 율법을 자신들의 실제적인 삶에 적용하기 위해 몸부림치던 이들이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하면 경건한 사람들, 특별히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려고 온 힘을 다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미지였습니다. 예를 든다면 아낙들이 모여 앉아 자식 이야기하는데, 우리 아들 바리새인이야 하면 모인 이들이 그래 훌륭하게 성장했네. 우리 아들도 그래야 하는데 이런 분위기입니다.
포로 귀환 이후도 이스라엘의 정세는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이웃의 어느 나라에 의해 통치되느냐에 따라 상황이 급변하게 변하던 시기였습니다. 유대인들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를 인정하는 이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문화와 종교를 인정하지 않고 헬라나 이방의 문화와 종교를 강요할 때면 어김없이 바리새인들은 그들에게 저항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저항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자기 목숨처럼 지키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바리새인들을 애국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면서 ‘의’에 대해서도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정결하지 못한 것을 철저하게 거부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는 ‘분리주의’, ‘구별됨’이라는 의미인데, 바리새인은 그 뜻에 부합되게 살았던 이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루살렘이 망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들의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결국 바리새인들만 남아서 유대의 전통을 지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님 나라’와 ‘의’에 대한 언급이 잦았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가까이했습니다. 분명 예수님의 말씀과 바리새인들이 추구하던 것들과는 공통분모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누가복음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집에서 자주 식사를 하시곤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의 기도가 응답 되지 못했다’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의아해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경건한 사람들의 기도가 “왜! 뭐가 문젠데! 왜 응답이 안 되었다는 거야?” 여러분이 알고 있는 가장 경건한 사람, 그 사람을 한번 떠올려보십시오. 그 사람의 기도가 응답 되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그런 경건한 사람들의 기도가 응답 되지 않았다면, 과연 어떤 기도가 응답 된다는 거야! 이런 반문을 하게 만드는 사람, 그 사람이 ‘바리새인’입니다. 예수님께 찾아와 진지한 질문을 했던,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을 들려주시게 했던 ‘니고데모’도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극적인 회심 이후에 죽기까지 순종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저 위대한 사도 바울도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했습니다. ‘자랑할 것이 있느냐! 나도 자랑할 것이 있다. 나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다’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의 기도는 일반적인 바리새인들의 기도문입니다. 본문의 저자가 이 기도문 전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으로 적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 무언가 잘못된 것은 틀림없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그렇게 열심히 경건에 힘쓰고, 말씀을 암송하고, 그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려고 몸부림치던 그들에게 과연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까? 힘 다해 금식하고, 철저히 헌신하며, 소득의 십의 일을 정성 다해 드리는 그들이 무엇이 잘못됐다는 뜻입니까?
문제는 그들이 ‘의’를 위해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자비와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향한 멸시가 마음에 점점 가득하게 됩니다.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자비하시니 너희도 자비하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자비와 사랑이 없는 겁니다. 자비와 사랑이 없으니 감격도 기쁨도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기도생활 열심히 하고, 교회 섬김을 열심히 하려 몸부림치는데 자신의 마음에서 ‘사랑’과 ‘자비’가 계속해서 사라진다면 기쁨과 희락이 사그라든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과 기쁨입니다.(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요 하나님 나라는 행복의 나라입니다.
이번에 강화 교동중앙교회로 수도원 기도회를 다녀왔습니다. 많은 성도님들께서 함께 해주셨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고, 맛있게 음식도 먹고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수도원 기도회 일정이 모두 마쳐지고 저는 강화에 있는 수도원에 하루 더 머물렀습니다. 기도하고 묵상을 하며, 글을 쓰려고 하는데 제가 소중히 여기는 만년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찾아보았지만 없었습니다. 밤새도록 잃어버린 만년필을 생각했습니다. 찾고 또 찾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기도회를 했던 교동중앙교회에 가보았지만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교회에서 만년필을 보관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얼마나 기쁘던지요. 제가 만년필을 잃어버리면서 한 가지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아끼는 만년필을 잃어버려도 마음이 쓰이고, 속상하고, 그것을 찾기 위해 애쓰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잃은 한 영혼을 얼마나 찾으시고, 마음 아파하며 기다리실까? 또 그가 돌아오면 얼마나 기쁘실까?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계속해서 이점을 상기 시켜 주셨습니다. 너희는 자비한 사람이 되라(눅6:36), 심판하거나 정죄하지 말아라(눅6:37) 바리새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세리와 죄인이 예수님 가까이 모여드는 모습을 보면서 바리새인들이 투덜거리자 예수님께서는 비유 세 개를 들려주셨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 잃은 드라크마, 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마지막 비유에서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하고 싶었던 말씀이 이것입니다. 큰아들아! 아우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다시 되찾았으니 즐기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15:32)
바리새인들이 생각했던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이 이 땅에 가지고 오신 ‘하나님의 나라’는 단어는 같았지만, 그 의미는 하늘과 땅만큼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는 ‘죄인과 병자’를 불러 모으는 나라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의’는 ‘인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 예수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인 그분을 통해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입니다. 기쁨의 소식입니다. 가난한 자, 억눌린 자, 눈먼 자에게 선포되는 은혜의 해입니다.
바리새인이 생각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온전히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요, 그렇기에 죄인과 세상과는 점점 분리되어야만 했던 나라입니다. 거기에는 배제, 비판, 거부, 분리만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다가는 바리새인의 길을 가기가 쉽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길은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 기쁨과 복음의 나라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길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는 ‘의’, ‘평강’, ‘희락’입니다. 자비와 사랑이 흐르는 곳입니다. 눈을 들어 잘 분별해야 됩니다. 내가 바리새인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합니다.
바리새인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게 하시는 유일한 길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데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참된 회개가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방법을 내려놓지 않는 이상 절대 자신의 악과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의 의’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기도는 회개에서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회개하고 계시나요. 가을은 회개의 계절입니다. 일 년 동안 하나님 앞에서 직분에 맞게 살지 못했음을 회개하는 계절입니다. 내가 장로답게 살았는가? 집사답게 살았는가? 성도라는 거룩한 이름을 가진 대로 살았는가? 회개해야 합니다. 돌아가신 배상조 권사님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정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말입니다. 하지 못한 일에 미련이 없다는 겁니다. 눈물의 계절이요, 애통의 계절입니다. 그래야 다음이 열립니다. 회개가 없으면 맴도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성장도 자라남도 없습니다. 단순히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서 은근히 이 정도면 괜찮지 하는 어리석은 마음뿐입니다. 그걸로는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합니다. 다른 이들 앞에 설 뿐이지요.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는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서게 되면 자신의 악독과 탐욕을 깨닫게 되고 참다운 회개에 이르게 됩니다.
모든 백성, 심지어는 세리도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세례받으셨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님의 옳으심을 드러냈습니다.(눅7:30)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기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물리쳤다고 했습니다.(눅7:30)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구상입니다. 인간의 어떤 ‘의’도 자기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영원한 구원의 유일한 이름입니다.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위대한 개혁자 루터도 이를 깨달았습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찰스 웨슬리도 이 중요한 것을 놓쳤구나 하면서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을 읽으면서 복음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에 대한 깨달음이 회심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신앙은 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닌 자신의 힘이나 경건으로 살아가려고 했던 이들입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주위의 신앙인들 가운데 이러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지 않으면서 무언가 일을 하려고 하는 모든 이들이 이런 사람입니다. 때로 사람들이 그들을 존경하고, 그렇게만 신앙생활하면 좋겠다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는 없습니다. 그 나라는 철저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 예수님으로만, 믿음으로만, 그분이 보내주신 성령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또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우리는 ‘세리’에 대해서 복음서를 통해 자주 들었기 때문에, 특별히 예수님이 늘 가까이하시고 많은 세리가 긍정적인 인물로 묘사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세리’를 긍정적인 인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세리는 세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의 기도가 응답되었다 의롭다 함을 받았다 하셨을 때 당시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은 어떻게 그런 사람이 ‘응답을 받았데! 정말이야!’ 하는 느낌입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언어로 사람들이 가장 괜찮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기도도 거부될 수 있으며, 가장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기도도 하나님께 상달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선명한 것은 비유의 언어로 표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세리는 비난받는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나를 따르라’ 초대하신 세리 ‘레위’는 게네사렛 관세사무소, 세관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헤롯의 관할 지역으로 들어오는 이들의 통행세와 관세, 상품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세관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입찰로 가장 많은 돈을 적어낸 사람이 ‘세리장’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다시 하청을 주는 구조였습니다.
당시 일하던 ‘세리’들은 부당한 세를 요구했고 그곳에는 언제나 ‘부패와 뇌물’이 만연했습니다. 그런 방식이 아니면 일이 진행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다른 나라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던 시기에 ‘세리’는 헤롯의 앞잡이이자, 헤롯가의 배를 불리는 자,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 자, 나라를 팔아먹는 자, 매국노로 취급되었습니다. 세리는 친근한 존재가 아니라, 듣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 악한 이의 표상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 죄인이었습니다. 악독했고 표독스러웠습니다. 사나웠고, 거칠었습니다. 있는 이에게 굽신거리고, 없는 이의 등을 처먹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가까이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바리새인들이 흥분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친일’에 대해서 민감한 시대입니다. ‘친일’을 그렇게도 싫어하지 않습니까?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해도 ‘친일’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선이 차갑게 바뀝니다. ‘세리’가 그렇습니다. 세리는 당시 지배자였던 로마의 앞잡이였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러한 ‘세리’의 기도도 응답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세리’가 기도 응답받았다면, ‘아! 우리의 기도도 응답 될 수 있겠구나. 내가 못할 게 뭐냐. 나도 응답받는 기도 올려야지’하는 바리새인과는 매우 대비되는 성격의 인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세리의 기도가 응답 되었다 할 때 세리에게 있는 어떤 선한 것 때문에 응답 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문제 많은 죄인 세리도 바른 기도를 드릴 때 그 기도로 인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리의 기도’는 유명한 기도입니다. 교회 역사상 가장 많은 이들이 이 기도를 사용해서 기도했다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힘 있는 기도입니다. 주님이 친히 가르쳐 주신 응답받는 기도 표본입니다. 세리는 성전 멀찍이 서서, 하늘을 감히 우러러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기도했습니다.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시옵소서.’
저도 이 기도를 오래전에 배웠습니다. 목회를 처음 나가서 배웠습니다. 지도교수님의 영성 수련에 매달 참석하면서 그곳에서 배웠습니다. 또 존경하는 한 목사님께 목회의 신학과 영성과 삶을 가르쳐 주신 목사님께 이 기도를 자세히 배웠습니다. 그리고 시골교회에서 언제나 이 기도를 올렸습니다. 서울에서 목회하면서도 이 기도를 드렸고, 뉴질랜드에 있는 동안에도 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나중에 영성을 공부하면서 기독교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기도를 드렸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이 기도를 드릴 겁니다. 이 기도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요, 소경이 외친 기도요, 나병환자들이 외친 기도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죄인에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요,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오는 우월의식은 전혀 없습니다. 언제나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설 때마다 깨닫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가슴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언제나 회개라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다는 것,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는 무능을 깨닫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의 산상수훈 설교에서 자신의 비참함, 불쌍함, 가난함, 눈멈, 벌거벗음을 아는 것이 회개라 했습니다. 자신이 영적으로 가난한 자임을 인정하고, 선한 것이 전혀 없음을 깨달으며, 자기 속에 악하고 가증스러운 것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회개입니다.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문둥병 든 존재이며, 죄가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퍼져있고, 선을 행할 수 있는 모든 기능이 망가져 있으며, 늘 악한 뿌리에서 악한 성품이 자라나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만심, 과대망상, 허영, 허세, 증오, 시기, 질투, 복수, 분노, 악의, 적개, 세상에 대한 애착, 아집, 어리석고 파괴적인 욕망, 상스럽고 거친 언어로 덕을 세우지 못하고 듣는 이에게 은혜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 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행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도로 악함을 아는 것이라 했습니다.
죄를 깨닫는 사람은 겸손해집니다. 낮아집니다. 이를 마음의 가난이라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라고 했습니다. 죄를 깨닫고 낮아지지 않으면 그다음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회심 때 빛을 보았고 땅바닥에 엎드렸습니다. 낮아져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세리라고 다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세리’ 중에 악한 이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등장하는 세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의 초대를 받은 후에, 하나님의 빛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회개입니다. 가슴을 치며 회개해야 합니다. 감히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 자복하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응답받는 기도는 회개의 기도입니다.
세리의 기도는 회개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죄악만, 자신의 무능만 바라보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구합니다. 주님의 자비를 붙잡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께 손을 내밉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저는 한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주님께서 오십니다. 하늘의‘의’로 오신 주님께서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나의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선물로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 영광입니다. 모든 무게는 주님 덕분입니다. 낮아지고 또 낮아집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는 커지고 더욱 커집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눅18:14)
자신을 낮추는 이들에게 은혜 위에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겸손한 이, 마음이 가난한 이는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기도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다면 그 얼마나 헛된 것입니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께 이르지 못하는 예배자가 얼마나 불쌍합니까? 회개의 기도를 올리십시오. 나는 불을 붙이러 왔다. 그러나 먼저 ‘세례’를 받아야 한다. ‘세례’를 받기 전에 고난을 받아야 된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불이 오기 전에 세례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신의 죄를 자복하며 죄 씻음 받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제사 때 먼저 씻어야 했습니다. 물로 씻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불이 임합니다. 엘리야도 먼저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고 그곳에 물을 들이부었습니다. 회개한 것입니다. 그곳에 하늘의 불이 임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어찌해야 합니까? 질문에 ‘회개하고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행2:38) 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주기도문의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것도 결국 성령입니다.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눅11:13)
기도는 회개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자비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와 무능력을 깨닫고 애통하며 간절히 주님의 도우심을 주님의 자비하심을, 끊임 없이 낙망치 말고 간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곳에 성령의 불이 떨어집니다. 예수님 불붙이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식어진 가슴에 다시 불을 붙이시러 오셨습니다. 성령의 불이 떨어진 그곳에 생명의 단비가 퍼부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만물이 새롭게 됩니다. 새로운 신비한 기운이 생명을 일으킵니다. 새로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의롭다 확신하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이들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회개해라. 낮아져라. 하나님을 바라보라.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해라. 그래야 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라.’ 응답받는 기도 드리시는 성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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